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팔 전투 (문단 편집) === [[무타구치 렌야|그분]]의 등장 === 사령관에 임명되기 이전 무타구치는 사단장 시절 [[대본영]]이 계획한 인도진공작전인 21호 작전을 무모하다고 반대했던 적이 있었다.[* 결과론이지만, 현대 시점에서 보자면 차라리 1942년 때 바로 결행하는게 '''그나마''' 일본군의 승산이 높을 때였다. 당시 영국군은 동남아 전선이 붕괴되며 잔존 부대만 간신히 [[영국령 인도]]로 퇴각한 뒤 패잔병들을 수습하며 전열을 가다듬던 시기라 인도의 방위력이 수습을 끝마친 임팔 작전 시기보단 낮을때였다. 물론 전쟁은 기본적으로 수비쪽이 유리한데다가 임팔의 험지가 어디가는건 아니니 개고생하긴 하겠지만, 상술했듯 '''그런 악재를 고려해도 지금보단 훨씬 나았다.'''~~무엇보다 무타구치가 사령관이 될 가능성이 낮았다.~~] 근데 정작 본인이 지역 사령관이 되자 임팔 작전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며 아삼이나 벵골에서 장렬히 죽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다시피 했다고 한다.[* 다만 뻔뻔하게 말 바꾼 수준은 아니고, 감히 상부의 명령을 거슬렀다고 자책은 많이 했다고 하는데 후대의 군사사학자들에겐 '초급 장교나 할 법한 생각'이라고 오히려 까인다. 사실 [[장성급 장교]]쯤 되면 안전이 확보된 후방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판단하고 그에 맞는 전술을 수립해서 지시해야 도움이 된다.] 사실 무타구치와 육군파의 이런 행보는 단지 눈앞의 승전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다. 무타구치는 [[루거우차오 사건|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원흉이며, 제15군 상급부대인 버마 방면군의 사령관인 육군대장 가와베 마사카즈는 자신이 속한 계파가 정쟁에서 대패해 본인도 중국으로 좌천된 상태에서 이를 만회하고자 무타구치를 막을 수 있음에도 '''오히려 이를 지지했고''' 정황상 같은 계파인 카와베도 이를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론은 역시 일본군의 전매특허인 파벌주의의 폐해로 이 '실책'을 만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이미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버마 북부에 영국군 게릴라 부대가 출몰하자 이를 역전의 기회로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당연히 이 게릴라들은 걸어서가 아니라 비행기로 공수된 병력이었지만 무타구치는 임팔 작전을 강행했다. 그리고 이 작전에 대한 반대의견이 나오자 자신의 작전에 [[칭기즈 칸]]이 했던 '약탈 보급'의 방식을 취할 것이라 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